문인의 내면적 진실성/주현중
『문인의 내면적 진실성』
- 수필가 주현중 -
흔히 우리가 말하기를 아무대서나, 아무 곳에서나 잡다한 넋두리를 그적거리는 것을 낙서라고 한다. 필자의 경험으로 본다면, 단 한 번도 연필을 들지 않다가 소위 말하는 낙서를 할 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비관을 할 때나, 누군가에게 불만을 품고 욕설을 퍼붓고 싶을 때나, 혹은 흉을 볼 때이다. 창작이라는 명제에 앞서 내면의 진실성으로 치자면 가장 근접한 진실성이 낙서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고 할 수 있다.
낙서에는 잡다한 넋두리의 글이나 그림도 그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낙서를 가지고 글이라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어떠한 범죄수사의 단서는 될 수 있어도, 창작이라는 명제 하에서 작품성 즉, 글이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창작을 하는데 있어서 때로는 글 같지 않은 타인의 하찮은 낙서를 보다가도 해성처럼 스치는 시제를 느끼기도 한다. 디지털시대라는 21세기를 달리고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언론의 홍수, 글의 홍수, 말의 홍수라고 한다. 이는 글을 쓰는 사람도 많고, 말을 하는 사람도 그만치 많다는 증거이다. 2006년 지금으로부터 불과 15년 전만 해도 ‘글의 홍수’, ‘말의 홍수’라는 수식어를 그리 흔하게 들어 본 예는 없다.
「글과 말은 가끔 상대에 따라 상처를 받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날 없는 칼이요, 실탄 없는 총」이라는 것은 세살 박이 코 흘리게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필자 역시 날 없는 칼을 휘두르고, 실탄 없는 총을 들고 사격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 칼과 총이 누구의 심장에 꽂힐지는 필자 자신도 모르는 일이다.
우선, 지난 과거에 모든 청소년들의 우상의 대상이 되었던 글쟁이들이 현시점에서는 그 치세가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늘어나지만, 그 누구도 노벨문학상 후보감이 아닌 이상은 대단한 존재,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지도 않으며 우상의 대상도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필자를 포함해 많은 기성작가들이 배출되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 각자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할 것은 ‘과연 나는 왜 문인의 길을 걷고 있는가?’이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베스트셀러작가가 되려고?, 내 이름 석 자의 명예를 얻으려고?, 부족한 배움에 대리만족을 느끼려고?, 불란한 사회질서와 사회인들을 계도啓導하려고?, 이도 저도 아니면 심심파적삼아 응모한 작품 하나가 얼떨결에 당선되어 등단작가라고 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위에서 제시한 물음 중 선문답하는 것 하나는 맨 마지막 사안이다. 얼떨결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사안에 포함된다고 생각되는 작가는 연필을 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재성을 지니지 않은 이상, 한번도 글을 써보지 않았던 사람이 심심파적삼아 쓴 작품이 당선될 리는 전에도 후에도 없을 일이다. 얼떨결에 등단하였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아무런 사전준비도 주관도 없다는 말이 되며, 자기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인 것이기에 연필을 놓아야한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글을 쓰는 글쟁이의 모든 창작물은 장르에 따라 허구성도 사실성도 내제되어 있는 것이 기정사실이지만, 「먼저 심장 깊은 곳에 묵히고 묵혔던 진실성이 그 밑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진실성이 없다면, 그 작품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나아가 많은 애독자들의 심안을 속이는 가식假植적인 작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식假植이란 말은 타인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인 양 속인다는 말이 아니라, 작품은 자신의 것이나 그 내용은 거짓말이라는 말이다.
필자는 2004년 수필부문으로 처음 문단에 입문한 이후, 이미 등단하기 이전부터 등단작가 및 미 등단 작가들이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다음커뮤니티의 다수 문학카페에서 습작활동을 하던 중 등단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등단 이후 어느 일반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 질문이란 {“문인들은 바람 안 펴요?, 섹스도 안하고 살아요?, 연애 시에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싶다고 낮이나 밤이나 노래 불러놓고 실물을 보면 무슨 양상군자마냥, 현모양처마냥 안 그런 척 하데요! 개인적으로 이메일로 보내는 연애 시에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싶다고 하면 나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발가벗은 누드 사진이나, 섹스 장면의 동영상을 퍼다 올리면 질색을 하더라고요, 나 참! 그러면서도 19세 이상만 가입되는 성인사이트에는 잘도 들락날락 하데요? 이것이 위선이 아닌가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일반 독자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이 물음에 어떻게 답변을 해야 오른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 때 필자는 위의 독자의 말을 듣고 문인으로서의 고민에 빠지기도 하였다. 필자 역시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모 여류시인에게로부터 연애시를 선물로 받으면 이는 하나의 작품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연애편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때 깨달은 것은 연애시란 시를 쓴 작가의 내면이 파악이 안 되는 안개와도 같은 장르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기류는 시간이 흐르면서 소멸되어 갔지만, 누드 사진을 보면 그 대상이 옆에 있다면 안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것은 기정사실이며, 섹스 동영상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는 것을 그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태어나 사춘기에 들면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 이성적인 감정이며, 조물주가 선물한 숨이 멎는 날까지 없어지지 않는 유일한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절제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문인이기 이전에 위선의 가면부터 벗어던지라.”는 말이 대못이 되어 가슴에 꽂힌다.
다만, 등단작가이든 일반 애독자이든 모든 장르의 문학작품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작품 속의 화자는 그 작품을 쓴 작가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데, 거의 글을 쓴 작가가 아닐 수가 있으므로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착각에 들지 말기를 바란다.」고 전하고자 한다. 단, 작품은 작품을 쓴 작가의 것이 맞다.
원문을 갈무리 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입문한 작가와 등단을 준비하는 예비 작가들에게 충분히 길잡이가 되고도 남을 ‘정광일’시인의 교과서적이고 참고서적인 귀감의 시, ‘도전(문인의 길)’이라는 절창을 소개하면서, ‘글을 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 되면 글을 쓰라.’고 말한 세계적인 독일 문학가‘릴케’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진정, 죽는 날까지 문인이기를 바란다면 계몽적이든 외설적이든 투철한 책임감과 프로근성이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맺는다.
하나,
두근거리는 가슴 진정시키며 무릎 꿇었습니다
출발선에서 골인 지점도 모른 채
땅을 보며 달려야할 거리를 계산했습니다.
둘,
엉덩이 치켜들고 무릎 세우며
고개 들어 먼 앞을 바라봅니다.
숨이 가빠옵니다
심장의 박동에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멀리 달려야할 길이 아물거립니다.
탕,
신호 소리와 동시 출발선을 넘어버린 탓에 후퇴란 없습니다.
1년을 달릴 건가
10년을 달릴 건가
100년을 달릴 건가
달려야할 정점이 어느 만큼인가 몰라도
출발선을 넘었다는 건 부정 할 수 없습니다.
앞만 보고 가는 길만이
펜과 글이 살 길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마른 목 거친 숨 탈수의 고통이 포기를 꼬드겨도
목표 향한 도전은 고개 숙임을 거부합니다.
승리의 영광이 기다리는 그 지점은 분명
도전 하는 자의 몫이라 믿기에 지친 몸을 독려합니다.
지금의 좌절과 외로움, 고통은
그날의 환한 웃음이 보상 하겠지요.
- 2006년 월간 한비문학 3월호 신작 초대시 : ‘도전(문인의 길)’ 83~84쪽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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