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불교교리 : 중국불교의 이해 - 2. 중국불교의 특징
중국불교의 이해
2. 중국불교의 특징
불교가 들어 오던 한(漢)대 중국은 유교적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즉 인간은 누구나 평등한 고귀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왕과 신하, 관료 지식인과 일반 백성이라는 상하관계에 의하여 공동체적 존재로 인정되는 사회였다. 여기에 반하여 주체적 존재로서 만유의 근원인 도(道)를 추구해 가려는 도가(道家)사상이 대두하였으며, 그의 민간신앙적 형태로 도교(道敎)가 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토양에 들어온 외래종교인 불교는 다분히 중국화되었으며, 연기(緣起) - 공(空) - 무아(無我)의 종지를 펴는 불교의 유입으로 인하여 중국 또한 삶과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중국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전의 번역을 통한 격의불교(格義佛敎)적 경향과 불교의 해석학 즉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의한 종파불교(宗派佛敎)의 형성이라는 점이다. 격의불교는 당시의 도가사상이 반영된 불교의 중국적 수용이며 종파불교는 넓은 지역에 여러 경전이 무분별하게 들어온 결과 특정 경전을 중심으로 생겨난 자연스러운 그룹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1) 경전의 한역과 격의불교
중국에서 불교 경전의 번역은 후한(後漢) 환제(桓帝) 건화 2년(148)에 안세고(安世高)에서 비롯하여 송(宋) 신종(神宗) 원풍 원년(1078)에 이르기까지 900여 년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것은 중국불교 역사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긴 시간으로서 범어 불전의 철저한 한역을 기초로 불경을 이해하고 해석한 주체적 불교수용의 자취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힘쓴 역경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나 주요한 몇몇 사람을 살펴본다.
먼저 초기의 역경가로 안세고와 지루가참이 있다. 안세고는 안식국(安息國)의 태자였다. 설일체유부의 소승불교가 왕성했던 안식 출신의 그는 선관(禪觀)과 아함(阿含), 아비담학에 정통해 있었다. 그가 낙양에 들어와 역경과 교화를 폈던 당시에는 환제가 궁중에서 노자와 부처를 함께 모시기도 하고 노자가 서방으로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 주창되던 때였다. 따라서 선관(禪觀)을 행하고 관련 경전을 번역하였던 그를 당시 사람들은 도교의 불로장생술이나 태식법(胎息法)을 하는 수행자처럼 보았던 것 같다. 그는 선, 아함, 아비담 관련의 경전을 많이 번역하였는데 특히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은 중국 선관사상사(禪觀思想史)에서 중요한 경전으로 꼽힌다. 지루가참(支婁迦讖, Lokaraks′a 支讖)은 대월지국 출신으로 후한 환제 말(166)에 낙양에 와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수능엄경(首楞嚴經)≫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등을 번역하였다. 그는 아함과 소승불교에 주력했던 안세고와는 대조적으로 주로 대승반야계통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도행반야경≫은 ≪반야경≫ 류의 최초 번역이며, ≪반주삼매경≫의 역출(譯出)로 아미타불을 소개한 점도 중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제국이 멸망한 후 삼국시대에 낙양과 장안의 한족이 남하하여 이룬 오(吳)나라의 역경가로 지겸(支謙)이 있었다. 대월지국 출신의 그는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유마힐경≫ ≪대아미타경≫등을 역출하여 낙양의 지루가참과 함께 반야 계통의 현학(玄學)적 불교를 유행시켰다.
서진(西晋, 265~316) 시대에는 위(魏)대에 일어난 노장학과 청담사상 등 유교의 체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 조류가 계속되었다. 이때 유명한 역경가로 축법호(竺法護, Dharmaraks.a)가 있다. 그는 월지국 사람으로 선조 때부터 돈황에 거주하였다. 그는 돈황뿐 아니라 주천, 장안, 낙양 등 여러 곳에서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다. ≪출삼장기집≫에서도 중국에 경전을 유포함에 그의 힘이 컸다고 격찬하고 있으며, 그 역경의 공적은 실로 구마라집 이전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번역한 경전 가운데 ≪정법화경≫ 10권은 인도 대승불교의 중요 경전인 ≪법화경≫을 처음 중국에 전한 것으로 그에 의하여 수많은 ≪법화경≫ 연구가를 배출하게 되었고, 아울러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의한 관음신앙이 보급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북방 흉노족에 의하여 서진이 멸하자 지식인이나 관료, 학식 있는 승려들이 남하하여 건강(建康)에 정착하면서 동진(東晋, 317~420)을 세웠다. 이때 유행한 것이 상류층 중심의 사대부 불교이며 그 성격은 노장사상과 융합되어 격의(格義)적 경향이 강했다. "격의"란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문헌의 표현을 빌어 오는 것이다. 이 시대 불교인들은 외전(外典) 특히 도가 문헌에 능했으며, 당시 지배적이던 반야사상은 만물의 본원을 무(無)라고 하며 그와 합일되길 지향하는 도가사상에 익숙한 지식인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따라서 불교사상을 중국인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반야경전의 번역자들에 의하여 이 방법이 사용된 것이다. 축법아(竺法雅, 4세기)는 처음으로 강법랑(康法朗) 등과 함께 격의를 불교이해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외전과 불경을 번갈아 강설하면서 여러 의심거리들을 해석하여 경의 뜻을 드러내었다. 도안(道安)도 초기에는 『노자』등 중국 고전의 말을 매개로 불전(佛典)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격의는 비합리적이고 현학적이며 원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이후 라집이 중국에 들어와 불교교리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불경을 번역해 낸 다음부터 격의의 방법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죚raj va)은 당(唐)의 현장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2대역성(二大譯聖)으로 꼽히는 후진(後秦, 384~417) 시대 인물이다. 그는 구자국(龜玆國) 사람으로 일곱 살 때 출가하여 모친과 함께 서역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승과 대승불교를 모두 배워 그 명성이 일찍부터 서역과 중국에까지 널리 퍼졌다. 전진(前秦)의 부견왕은 그를 초빙하고자 여광(呂光)에게 구자국을 쳐서 그를 모셔올 것을 명하였으나 여광이 돌아올 무렵에는 전진이 망하고 후진이 일어났다. 이에 여광은 도중에서 후량국(後凉國)을 세워 라집도 그곳에서 16,17년간 머무르다 후진의 요흥왕이 홍시 3년(401)에 후량을 토벌하여 그를 장안으로 모셔오게 된다. 그 후 12년여 동안 오로지 역경과 강설에 주력하여 문하에 3천여 명에 이르는 제자를 두었다. 그가 번역한 경론은 74부 384권에 이르는데, 특히 반야계 대승경전과 용수와 제바 계통의 중관 논서의 번역에 힘을 기울였다. ≪중론≫ ≪십이문론≫ ≪백론≫ ≪대지도론≫ ≪성실론≫등의 대승 논서는 바로 이때 그에 의하여 처음 전래된 것이다. 그중 앞의 세 가지 논서는 남쪽 지방으로 전해져 삼론종(三論宗)을 낳았으며, ≪대지도론≫과 ≪법화경≫의 번역은 천태종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성실론≫은 성실학파의 기초가 되었다. 그 밖에도 정토계 경전을 번역하여 정토교의 소의(所依)가 되도록 하고 미륵신앙을 발달케 하였으며, ≪좌선삼매경≫ 등을 역출하여 대승의 선(禪)을 유행시키고 ≪범망경≫과 ≪십송율≫로써 대승의 계와 율을 전하였다. 그는 번역의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언어구사와 유창한 문장력으로 경의 뜻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내어 역경사(譯經史)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당(唐)의 현장(玄斡, 600~664)은 출가 후 ≪열반경≫ ≪섭대승론≫과 아비담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배웠으나 인도의 원전에 바탕하여 불교를 연구하려는 뜻을 세워 인도로 멀고도 험한 구법(求法)의 길에 올랐다. 마침내 인도의 나란타사에 도착한 현장은 계현(戒賢) 논사에게서 유가유식의 깊은 뜻과 이치를 배우고 인도의 여러 불교유적지를 순례하고 나서 육로를 통하여 17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자은사(慈恩寺)의 번역원(飜譯院)에서 역경에 종사하며 서역과 인도여행기인 『대당서역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약 20년간 75부 1,335권에 이르는 많은 경론을 번역하였는데, ≪대반야경≫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섭대승론≫ ≪대비바사론≫ ≪성유식론≫ ≪구사론≫ ≪순정리론≫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의 번역은 일자 일구도 빠뜨림이 없이 엄밀하게 번역하여 경전 번역의 새 장을 열었다. 그리하여 현장 이전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하고 현장 역을 신역(新譯)이라 부르게 되었다.
2) 교상판석과 종파불교
동진시대 이후에는 번역된 경전이 어느 정도 쌓이자 계속되는 역경작업과 더불어 경전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중국이라는 넓은 땅에서 교통과 인쇄술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각기 자신의 지역에 전래된 경론을 중심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각 경론에 담긴 내용을 중심으로한 연구가 남북조 시대부터 수․당대까지 계속되어 마침내 13개에 이르는 종파(宗派)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종파 중심의 불교는 인도불교와는 다른 가장 중국적인 불교의 형태다. 이것은 부처님의 직설에 기반하여 시대에 따라 여타 사상과의 대립 속에서 변천해 온 인도불교와는 달리 역경(譯經)을 중심으로 교통이나 인쇄술의 미발달과 같은 당시의 문화적 여건에 의해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중국불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3가지 종파 가운데 비담종(毘曇宗,俱舍宗)․성실종(成實宗)․지론종(地論宗)․
섭론종(攝論宗)․삼론종(三論宗)․법상종(法相宗)과 같은 경우는 논서를 소의로 한 것이며, 열반종(涅槃宗)․율종(律宗)․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선종(禪宗)․정토종(淨土宗)․
진언종(眞言宗)은 경과 율을 소의로 성립된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논을 소의로 한 대부분의 종과 열반․율종의 경우는 교단을 형성하였다기보다는 학파로서의 성격이 강하여 후대까지 계속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나머지 천태․화엄․법상․선․정토․진언종은 당대 이후까지도 나름대로의 교학을 발전시켜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우리 나라 불교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들 종파 형성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요구되었던 것이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교상판석이란 경전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가름하여 부처님의 본 뜻을 바르게 해석하고 밝히려는 시도로서 한마디로 불교의 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에서의 경전성립 순서와는 무관하게 전래된 각종 경전을 마주하게 된 중국인들에게는 필요불가결한 방법론이었다. 실제로 종파가 형성되기 이전인 남북조 시대부터 다양한 설법내용을 담은 경전들에 대하여 그 설법시기, 대상, 목적, 방법, 그리고 사상의 깊고 얕음을 가름하여 경전을 분류하고 그 서열을 정하는 이러한 해석법이 행해져 왔다. 천태 지의(天台 智剡, 538~597)가 그의 교판을 말하기에 앞서 당시 행해지던 남북조의 교판을 "남삼북칠(南三北七)"의 열 가지로 요약한 것에서도 당시의 교판사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의 모든 교상판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천태의 오시팔교판(五時八敎判)과 화엄의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이다.
천태의 오시팔교판은 지의의 ≪법화현의≫ 권9, 10과 고려 제관(諦觀) 법사의 ≪천태사교의≫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오시(五時)란 대소승의 모든 경전을 부처님의 설법시기에 따라 화엄시(華嚴時), 아함시(阿含時), 방등시(方等時), 반야시(般若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의 다섯으로 분류한 것이다. 화엄시는 ≪화엄경≫을 설한 시기로, 부처님 성도 후 3․7일 동안에 해당한다. 아함시는 ≪아함경≫을 설한 시기로 부처님 성도 후 12년간이며, 방등시는 ≪유마경≫ ≪능가경≫ 등의 대승경전을 설한 시기로 그 다음 8년 동안이다. 반야시는 ≪반야경≫을 설한 시기로 22년간이며, 법화열반시는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시기로 최후 8년간에 해당한다. 이것은 마치 해가 뜰 때 처음에는 산꼭대기만 비추지만 점차 깊은 계곡과 마루를 비추어 정오가 되면 온 세상 구석구석을 환히 비추는 것처럼 ─ ≪화엄경≫ <보왕여래성기품>의 "삼조유(三照喩)" ─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하신 내용을 말씀하시자 극소수만 알아들을 뿐이어서 점차 방편을 펴서 교화하시어 마침내 법화열반을 설하실 때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없고 구제되지 않는 이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팔교(八敎)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화 형식과 교화 내용에 따라 각각 넷으로 분류한 것이다. 앞의 것은 화의사교(化儀四敎)로서 돈교(頓敎)․점교(漸敎)․비밀교(秘密敎)․부정교(不定敎)를 말하며, 뒤의 것은 화법사교(化法四敎)로서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이다.
화의사교의 돈교는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직접적으로 설하여 단박에 깨달음을 얻도록 설하는 방법이다. 오시 가운데 화엄시에 해당한다. 점교는 깨달음의 내용을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또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치는 방법으로 아함시, 방등시, 반야시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비밀교란 대중들이 같은 설법장소에 있으면서도 서로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청중들이 어떤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는지도 모르는 경우다. 이와 같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人]은 물론 받는 가르침[法]도 서로 알 수 없어 비밀스럽다는 것이다[人法俱不知]. 반면에 부정교는 한 장소에서 여러 근기의 대중들이 있을 때 불가피하게 대승이나 소승의 한 가지 법문을 설하더라도 각자의 근기에 맞게 이해하여 각각 얻는 이익이 다름을 말한다[人知法不知]. 즉, 함께 듣지만 이해를 달리하는 상황[同聽異聞]이다. 비밀교과 부정교는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교화방법으로 어떤 특정 경전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화법사교다. 이것은 앞의 오시나 화의사교처럼 기존에 행해지던 분류법을 응용한 것이 아니라 천태의 고유한 분류법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장교는 "삼장교"의 준말이며 경, 율, 론 삼장을 위주로 하는 소승불교를 말한다. 오시 가운데 아함시에 해당한다. 통교는 성문․연각․보살 모두에게 공통되는 가르침이며, 별교는 오로지 보살만을 대상으로 하여 다른 것과는 구별되는 가르침이다. 원교는 원융하고 원만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화엄, 법화, 열반과 같은 경전에는 오로지 원교의 뜻만 있다고 한다. 천태는 사실상 모든 경전에 원교의 뜻이 있으나 보는 이가 그 뜻을 알지 못하므로 장교나 통교, 별교의 내용만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천태의 오시교판은 실제 경전 성립 순서와는 일치하지 않으나, 부처님의 깨달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열어보여 깨달아 들어가게 한다[開示悟入佛知見]는 법화경의 취지에 입각하여 구성한 것이라는 점과 부처님께서 성도를 선언하고 온갖 방편으로 중생 구제에 힘썼던 그 일생을 그대로 되살려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음으로 화엄의 오교십종판을 살펴본다.
화엄사상을 집대성한 현수 법장(賢首 法藏, 643~712)은 모든 교설을 화엄경을 중심으로 체계화하였다. 오교(五敎)란 소승교(小乘敎), 대승시교(大乘始敎), 대승종교(大乘終敎), 돈교(頓敎), 원교(圓敎)이다. 소승교는 아함의 교설이며, 대승시교는 대승에 처음 들어가는 가르침으로 여기에는 공시교(空始敎)와 상시교(相始敎)가 있다. 공시교는 반야경류이며 상시교는 ≪해심밀경≫이 해당된다. 대승종교는 대승 종극의 가르침으로 열반경, 능가경이 해당되며, 돈교는 단박에 깨달음을 이루는 교설로 유마경 등을 말하지만 후대에는 선종을 여기에 배대했다. 원교는 원융무애한 가르침으로 법화경, 화엄경을 말한다. 여기에도 별교일승과 동교일승이 있는데, 동교일승은 삼승을 융섭하기 위한 것으로 법화경을 말하며, 별교일승은 일승이나 삼승의 구별을 떠난 구경일승의 교설로 화엄경을 말한다.
십종판은 경전에 담긴 종취를 중심으로 분류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나와 법이 모두 있다고 하는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 법은 삼세에 걸쳐 실제로 있으나 나는 없다는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 현재의 제법만 있으며 과거나 미래의 법은 실체가 없다는 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 현재법 중에도 거짓과 진실이 있다는 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 속제는 허망하고 진제가 참이라는 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 일체법은 다만 이름뿐이고 실유가 아니라는 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 일체법은 다 진공이라는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 일체법은 진여로부터 연기한 것이니 진여에는 무한한 공덕이 갖춰져 있는 여래장의 실덕이 있다는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 능연심과 소연상이 모두 끊어진 무념무상의 경지를 추구하는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 사사무애법계이므로 낱낱의 현상은 모두 일체의 공덕을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다는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이다. 이 열 가지 가운데 앞의 여섯은 소승, 뒤의 넷은 대승교설을 그 종취에 따라 나눈 것이다. 특히 끝의 원명구덕종이 바로 별교일승으로 다함 없는 자재무애함을 드러내는 화엄경의 법문이라고 한다. 이 열 가지의 구분에서는 인도불교교리사의 발달을 따라 불교를 해석하려 한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각 종파에서는 자신이 소의로 하는 경론이 부처님의 참뜻을 가장 잘 표명하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경전의 우열과 사상의 깊이를 논하여 교판을 세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