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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명상 ♬

호흡을 넘어서.

 

 

 

호흡을 넘어서


참선에서건, 요가에서건, 혹은 위빠사나나, 국선도나,

심지어 단학선원에서도 호흡수련을 가장 첫 단계 그리고 기본이 되는 기초수련으로 친다.

그리고, 문파는 다를 지언정, 인간에게서 행해지는 수련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또 대동소이해야 할 것이다. 다르다면 옳은 것이 아니다.
(약간의 특색의 차이는 있겠지만. 혹은 자파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차별성을 주장하겠지만,

오히려 같다는 것이 바로 “그것도 정답이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호흡”하는 인간 개체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흡은 기본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라고 한다.

참선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본업이요,

혹은 묵조선에서는 무념무상을 한다든가,
그리고, 위빠사나에서도 호흡의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이 목적이지,

호흡 그 자체 풀무질은 목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국선도나 도가에서도, 수행의 결과로 운기조식하여,

자연과 기가 합하고, 정기신(精氣神)이 합일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니,  지관법이나 요가에서도, 호흡을 관(觀)하라는 것이지

그저 풀무처럼 호흡하라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면 호흡 그 자체보다는 "호흡을 관하라"는 게 더 정확한 내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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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관심은 호흡 보다는 관(觀)이다.
그러니까, 호흡도 일종의 관의 대상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듯하다.
그러니까, 화두선은 화두를 관하는 것이고 (음, 좀 비약이 있기는 하다),
묵조선은 생각없음을 관하라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일어남 사라짐”을 관하라는 것이다.
국선도도 요즘은 이런 걸 강조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라봄” 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위빠사나의 이론이 가장 잘 돼 있으니까,

그걸 근거로 본다면,  그리고 요가 이론에서도,

관의 대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유상관이 있고, 무상관이 있다.  
호흡을 보기도 하지만, 일몰을 보기도 하고,
촛불을 보기도 하고, 만다라를 보기도 하고, 불상을 보기도 한다.

형체 있는 것을 보기도 하지만, 형체 없는 것을 보기도 한다,.
무엇을 보느냐, 형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초보 단계라고 한다.

또, 위빠사나에는 4념처가 있어서 신수심법, 즉, 신념처, 수념처, 심년처, 법념처가 있다.
또 무슨 무상관도 있다.
관의 종류를 아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이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보자들이 몸으로 체험하기에는 호흡을 통하여 체험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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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 몸이 (혹은 마음이, 혹은 내가) 무엇을 보려면, 보는 자가 있고, 보는 대상이 잇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물론,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봄”은 육체적인 활동은 아니다.육체적이기는 하지만, 정신적이고, 정신적인 것만도 아니고. . .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암튼, 육체나 정신이라는 말로는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의 주제이다.

“무엇이 보느냐, 무엇을 보느냐, 암튼, 육체적 눈이 보는 것은 아니다. ” 이것이 오늘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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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육체적인 눈이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몰 수 있는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육체가 느끼는 감각 뿐이다. 맞는가?
우선,
1) 눈을 감고서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

그것은 빛이 차단된 안구에서 일어나는 시각적 현상일 수 있다.

2) 그것이 아니라면, 눈 앞에서 관세음을 떠 올리고, 애인의 얼굴을 떠 올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더 올리고. . .  

그런 것은 일종의 정신의 작용, 즉 “상상” 이라는 작용일 것이다.

머리에 떠 올리는 것이지, 보는 것은 아니고,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대 얼굴을 머릿속에 그린다, 뭐 그런 차원의 현상이다.

이것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가끔 요가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너무도 또렷이 다른 어떤 풍경이 떠오르고

그 세계에 가서 한참씩 놀다가 온다”고 한다. 어떤 책에는 사진현상이라고도 써 있고,
그러나, 내가 안 겪었으니, 뭐라고 얘기하긴 힘들다.

또, 이건  과위(果位)의 얘기니까, 지금 애기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3) 그것 이외에는 우리가 보는 것은 없는것 같다.
아, 꿈과 같은 현상이 있을 수 있다. 눈을 감으니, 저절로 어떤 터널과 같은 것이 보이고,

혹은 넓은 풀밭이 보이고. . . .

이런 것들도 일종의 정신적 현상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즉, 상(想)이 아닐지.
그러니까, 그걸 자기가 본다(觀)는 아닌 것 같다.  

4) 그렇다면 눈을 감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일까?
이 경우, 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있다.  

안이비설신이 느끼는 감각을 말한다. 즉, 수(受), 感受, 퍼셉션(영어가 안 써져요)의 영역이겠다.  
위빠사나에서도 본다는 말로 표현되었지만. 사실 이 느낀다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일어남 사라짐”의 내용이 그렇다.

왜그러냐 하면, 솔직히 말해서,  “느낀다” 이외에,

그리고 “상상한다” 이외에  우리가 눈을 감고 “본다”는 영역이 있을 수 있을까?

이제 가장 심각한 문제에 도달하였다.
우리, 솔직하자.
대답해 보라.

“느낀다” 이외에,
그리고 “상상한다” 이외에  
우리가 눈을 감고 “본다”는 영역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때, “본다” 면,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무엇이 보는가.

위빠사나 행자여, 대답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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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에서는 이 때, “단전을 보라” 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단전을 보거나, 혹은 단전에서 어떤 생리현상(단전이 아프다든지,

살살하다든지, 배가 부르다든지, 호흡에 의해서 단전이 움직인다든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냥을 단전을 볼 수 없다.

흔히, 비유하건대, 왼쪽 팔이 없는 사람도 왼쪽 팔의 아픔을 느낀다고 한다.
또, 나는 가금 심장이 아픈데, 그 때는 왼쪽 팔도 함께 저르르 아픔을 느낄 때도 많다.
이 때, 팔이 아픔을 느끼는 것은 오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느낌은 느낌이다.

그건 사실이다. 비록 그 증상의 원인은 심장에 있을 지라도.
축농증이 생겨 코에 고름이 많으면 두통이 심해진다. 이때, 골이 아프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즉, 감각과 신체의 소재, 혹은 그 원인의 소재는 얼마든지 다르다는 것이다.
둘째 손가락을 다쳤어도, 그 아픔의 소재가 바로 둘재 손가락이라는 것을 정확히

분별해 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한 밤중에 눈을 떴을 때, 아무 신체적인 감각이 없을 때, 깜깜한 상황에서,

보지 않고 우리는 자기의 팔, 손가락, 혹은 내장의 위치를, 그 감각을 알아낼 수 있는가?
없다.

결국, 우리는 우리 신체를 보는 것이,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은,

그 장기가 느끼는 감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장기가 느끼는 느낌이 없다면

우리가 그 장기를 “본다” 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장을 (무엇으로? 일단 “마음의 눈으로”라고 해 두자) “볼 수 없다”
우리는, 단전도 볼 수 없다.

그러니, 위빠사나여, 무엇을 본단 말인가. 관을 해라? 무엇을 어떻게 관하란 말인가.
이 사기꾼들아. 정확히 말해라 “느낀다”는 것이지?
즉, “느낌”이 없다면 관(觀)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지?
인정해라 이놈들아.

색수상행식에서 수, 상이외에 어떤 정신작용이 있을 수 있나.
(안근이 색을 만나 안식을 동하여 제 6식이 그것을 인식하는 것 말고,

안근 없이 물질적 색  없이 어떻게 무엇을 보나? 그것은 受와 想 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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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무엇을 본다” 할 때, 수 없이도, 상 없이도, “본다 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깨닫고 몸과 마음이 느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 짐작에)
이때, 무엇을 보느냐, 보는 대상을 상분이라고 하고,

누가 보느냐하는 보는 주체를 견분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수와 상은 아닙니다. 그것이 수와 상이라면 범부나 육충(肉蟲)에게도 잇는 것이고,

그것을 “깨달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수와 상 없이 뚜렷이 보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수와 상 없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 무엇이 “일어남 사라짐”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신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고,

자기 마음에서 혹은 정신에서 혹은 기에서 일어나는, 혹은 자연에서,

혹은 외계에서,혹은 환경에서, 혹은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증상일 수도 잇습니다.
그 엄청난 거부할 수 없는 세계를 느껴야 한다는 거 겠지요.
아마도 화두 타파의 소리가 이런 것일지도 모르지요.
기왓장 깨지는 소리에 깨닫게도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
(물론,그냥은 안되고 많은 수련이 있어야 되겠지만)


이때, 보는 자, 그것을 견분이라고 하는데, 이건 물론, 생각이 아니고,

관념도 아니고, 안식이나 의식도 아닙니다. 육체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지만,

정신과 마음을 합친 그 무엇이겠지요. 비슷하게 표현하면

 “온 몸으로 본다”“온몸으로 깨닫는다” 그러게 될 겁니다.

흔히 이것을 좀더 구체화해서,혹은 가시화해서 표현한 것이 “제3의 눈”혹은  “심안” 이렇게 될 겁니다. (그러나 이건 견분의 본체를 좀 축소, 왜소화시킨 표현으로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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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식에서 말하는 견분의 뒤에 잇는  “견분을 보는 놈”을 자증분이라고 한다는데,

이건 견분, 상분도 잘 모르는 우리로서는 도를 넘는 얘기고,
일단, 느낌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그 무엇을 보는 일 (相分)” 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면 보는 놈이 누구인가“(이게 바로 간화선에서 ”이뭣꼬”가 되갰지요)

(見分) 를 체득하는 일이 중요할 겁니다.

 

 

 

선재마을 홈피 [야단법석]에서 모셔옴

 

http://www.sunjaemaeu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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