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류 문예지에 당선된 詩 그리고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詩는
교수급 혹은 저명한 시인님들이 뽑으신 것이니 잘 쓴 詩라고 인정받고 있다.
(당선작이 잘 쓴 詩가 아니어도 그들이 그렇다 하면 그리 되는 것이다.)
인정받은 시들은 다음 해에 응모작의 텍스트가 되어 소위 말하는 신춘용 시들로 재탄생한다.
그럼 당선작들을 보자. 100%로는 아니지만
대게의 당선시를 읽어 보면 수용자(需用者)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생각하지도 못한 시어를 구사하거나 끌고 가는 힘이 있어
어찌 이리도 잘 쓸까 하고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게 한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잘 쓴 것 같은데 한두 번 읽어서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떤 작품은 수십 번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詩도 있다.
그렇다고 당선작 전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신춘이나 메이저급 문예지의 당선을 희망하는 문청들은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당선작을 읽으며
저명하고 배움이 많은 분들이 뽑은 당선작이니 분명 잘 썼을 것이고 좋은 詩 일 것이니
잘 복용해야 나도 건강한(?) 詩를 탄생 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여 장복하게 만든다.
심리치료 요법으로 좋다(긍정)라는 믿음이 사람의 병을 낳게도 한다.
그러나 작금의 시는 믿음만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 중병에 걸려 있다.
혹자는 시인의 숫자로 많이 늘었고 인터넷의 발전으로 시를 사랑하는 사람도
그에 상응하여 많이 늘었다고 말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난해하고 이해되지 않는 시들로 인해 사람들 손에서 시와 시집이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시집을 사는 사람도 시인이요 시를 읽는 사람도 시인인 세상.
결론적으로 시인만을 위한 시들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인 것이다.
난해하고 화려한 말장난은 시를 읽는 독자를 잃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무슨 뜻인지 모를 이야기를 나열한다 해서 사유가 깊어지는 건 아니다.
화려한 옷치장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잘 쓴 거 같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할 책임이 시인에게 있는 것이다.』 - 멋대로 시 읽기 중
좋은 시와 잘 쓴 시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잘 쓴 시만 동경이 되는 세상 시가 죽어 가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 됐는지 짚어가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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