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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자작글 ♬

추억이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

추억이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



 며칠 전, 국제수학경시대회 일로 중국으로 떠나는 아이를 배웅하기 위해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 빼곡히 주차된 차들을 보며 작은아이에게 한마디 했다.

 “상규야, 학교까지 멀지도 않은데 우리 걸어갈까?”

 “왜요? 날도 추운데 그냥 차를 타고 가면 되죠.”

 “있지, 지금 나갔다가 돌아오면 차 댈 곳이 없어질 것 같아.”

 “갈 땐 저랑 같이 가니 괜찮은데ㅡ 돌아올 땐 엄마 혼자 오셔야 되잖아요.

  엄마는 너무 아름다워서 밤길 위험해서 안 돼요.”


겨울밤이라 날도 춥고 짐도 있으니 걸어가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참 기분이 좋았다. 콧물 흘리며 초등학교 입학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자라 엄마의 기분을 오히려 기분 좋게 하는 아이로 자랐으니 말이다.

아이를 배웅하고 돌아와, 태어나면서부터 유난히 많이 아팠던 큰애와

건강하고 활달한 작은애를 키우면서 하나하나 만들어놓은 앨범을 펼쳐 들었다.


하나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시골 할머니 댁 마당에서 송아지와 개를 데리고 노는 아이들과 외할아버지의 해맑은 모습이었다.

한쪽 구석엔 짚단들도 보인다.

문득 어떤 하루가 떠오른다.

신정을 이용하여 외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갔었던 것 같다.

내 고향은 경주라고는 하나 깊은 산골이라 유난히 추운 곳이기도 하다.

집 앞엔 졸졸거리는 도랑이 있고, 하릴없는 겨울 텃밭엔 볏단을 쌓아놓은 짚볏가리가 있다.

 그리고 개조한 안채 옆 사랑채엔 쇠죽을 끓이는 무쇠솥과 고구마를 구워먹던 아궁이,

그리고 지글거리도록 군불 땐 사랑방이 있다.

이런 시골집이 회색빛 도시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겐 남다른 추억을 만드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날도 그랬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군고구마 구워 먹으며 뒹굴거리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더니

꽁꽁 언 도랑에서 미끄럼 타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어릴 적 동무들과 썰매 타던 일을 생각하며 입 안 가득 미소를 머금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한참을 지나도 아이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산골이라 별일 없으리라는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신 할아버지께서 밖으로 나가시더니 기겁을 하시는 것이었다.


좁은 도랑에서 서로 밀고 당기며 한참을 놀다가 그것도 놀만큼 놀았던지,

어느 샌가 텃밭에 쌓아놓은 짚볏가리 위로 올라가 붕붕(트램펄린)을 타듯 뛰고 놀았던 모양이었다.

다섯 개구쟁이들은 완전 짚북데기가 되어 있었고,

겨우내 소의 여물이 되고 외양간 이부자리가 될 짚볏가리가 무너져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으며,

작은 텃밭은 온통 지푸라기 천지로 변해 있었다.

쿠션 좋고 넘어져도 아프지 않으니 마음 놓고 뛰었던가 보았다.

손주들의 노는 모습이 즐겁기도 하지만, 다시 정리해서 쌓아야 할 일거리를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으셨던 할아버진 연신 웃음 반 당황 반으로 웃고 계셨다.

도시에서 컴퓨터나 오락기를 가지고 게임하던 아이들에겐 장난감 없는 시골이 심심했는지도 모른다.


비록 어질러놓은 일거리 때문에 할아버지를 힘들게 하였지만,

연날리기나 썰매타기 같은 어우러져 놀 수 있는 놀이문화가 아닌 경쟁하는 인터넷 게임문화 속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되돌아보고 웃을 수 있는 추억을 만들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여럿 되는 또래의 사촌들과 공유하는 추억이 있고, 되돌아보며 웃을 수 있는 기억,

그것은 훗날 이 아이들의 재산일지도 모른다.


어느 때부터인가 추억 없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딱딱한 경쟁이 아닌 어우러져 함께하는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

화려한 백화점이 아니어도 좋고, 팽팽 돌아가는 PC방이 아니어도 좋다.

포도 한 고랑에 감자 한 고랑, 가지가지 야채가 자라는 텃밭만 있으면 족하고,

개와 고양이가 뛰어노는 할아버지 댁 마당이면 족하지 싶다.

무엇보다 온갖 놀이를 가지고 있는 자연의 품속이면 족하지 싶다.


누군가 그랬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요즘도 아이들이 외갓댁엘 가면 외할아버진 가끔 한마디씩 하신다.

 “짚볏가리 위에는 올라가지 말거래이“



09.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