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詠半月” 감상
2005 년 2 월 1 일/석우 생
詠半月
黃眞伊
誰斷崑山玉
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壁空虛
누가 곤륜산 옥을 잘라내어
직녀의 빗을 만들어 놓았는가
견우가 이별 뒤에
시름 속에서 허공에 벽을 던져 놓았다
(1) 이별 뒤에 오는 아픔
연인들이 헤어지면 아픔을 가지게 된다. 그 아픔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건 대응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견우와 직녀의 경우는 어떠하였을까. 견우는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다가 직녀의 초상(벽)을 걸어 놓았다. 위의 시의 제 3 행과 제 4 행의 서사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이 내용에 상응하는 것이 제 1 행과 제 2 행의 서사이다.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잘라다가 직녀의 빗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였다. 상응하는 이 두 서사의 내용은 이미지의 의미에 있어서 같다. 다만 제 1 행과 제 2 행의 서사가 문제의 제기라고 한다면 제 3 행과 제 4 행은 문제의 해결에 해당한다. 전자가 추상적이라면 후자는 구체적이다.
전자의 서사에서 주역은 누가이다. 누가 옥을 가지고 직녀의 빗을 만든다는 것이 요점이다. 후자의 경우에서는 주역이 견우이다. 요지는 견우가 허공에다가 벽을 던져 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와 견우는 같다. 누가는 직녀의 빗을 만든 사람이다. 서사의 전체 맥락에서 직녀의 빗을 만들 수 있는 이는 견우 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가는 견우와 동일하게 간주되어도 좋다. 견우를 아닌 척하고 누가라고 적어 놓은 것은 문학의 반어적 기법을 빌린 황진이의 수사이다.
누가가 견우와 동일시될 수 있다면 그 둘에 의하여 각기 만들어진 것으로 표현된 빗과 벽도 동일하게 보아서 좋을 것이다. 물론 그 둘은 저마다 나름의 개성이 있어서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둘이 이미지상으로 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보자. 빗은 견우가 곤륜산의 옥을 떼어다가 손수 지은 것이다. 벽도 견우가 손수 하늘(공허/허공)에 던져 놓은 것이다. 견우가 손때를 뭍혀서 애지중지한 것이라는 점에서 첫째 둘은 같고 둘째 모두 직녀를 비유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빗과 벽과 직녀가 모두 같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빗과 벽과 직녀 모두를 비유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반달이다. 이 점은 우선 시의 제목에서 이미 시사되어 있다. 그것은 반달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시의 서사를 이미지를 중심으로 세밀히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하여진다. 이와 관련하여 빗의 모양이 반달과 같다는 사실을 먼저 떠올릴 필요가 있다. 벽을 던져 놓은 곳이 허공이라는 사실도 주의가 간다. 허공은 하늘이다. 하늘은 반달이 머무는 곳이다. (재료가 된 구슬 玉과 빗의 뜻인 梳에서의 나무 木변 그리고 빗과 같은 뜻의 壁에서의 흙 土변, 그러니까 玉과 木과 土의 셋이 모두 자연물이라는 점도 싯말 고르기에서 황진이의 유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서 壁자 대신 璧자를 써서 구슬 玉 자를 살리었더라면 이미지상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그렇게 되면 서사의 흐름으로는 좀 어색하여지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2) 이별의 미학
사랑은 두 연인의 합일을 의미한다. 그것이 사랑의 운동방향이다. 거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다. 그러나 연인의 합일이 언제나 이루어져 있을 수는 없다. 연인이 살아가는 인생이 그러한 까닭이다. 합일을 가로막는 요인이 어디 하나 둘인가. 그 가운데서도 이별이 대표적 일 터이다. 이별 뒤에는 사랑병이 따른다. 그것은 어느 연인도 피해 가기 어렵다. 사랑병에는 증세가 따른다. 다음 셋이 대표적이다. 그리움(상사), 기다림(불안), 목마름(공허/고독)이 그것이다. 이 세 증상을 이겨내지 못하면 절망이 온다.
견우는 직녀와 헤어진 뒤 다른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랑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 시름에 잠겼다. 마음은 텅 비어 외로웠다. 그가 절망의 길목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름 속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 시름을 이겨내기 위하여 그는 움직였다. 그는 손을 들어서 벽을 던졌다. 擲이란 손으로써 무엇을 던진다는 뜻이다. 그는 외로움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외로움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가 벽을 던진 곳이 공허였다. 그 空虛에는 하늘의 이미지도 있지만 외로움의 이미지도 있다. 壁이란 바람과 같은 무엇인가를 막는 것이란 뜻이다. 벽을 허공에 던져 놓았다는 것은 그러므로 고독을 막아서 그것을 차단시킨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 좋다.
앞서 말한대로 벽은 빗과 직녀와 반달과 모두 서로 이미지상 의미가 통한다. 그러므로 벽은 곧 직녀로서 견우의 시름도 외로움도 거기서 오는 절망도 모두 차단시켜 준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직녀가 하늘의 반달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半月에서의 半은 직녀가 외짝으로 있다는 것에 대한 암시이다. 그 가운데 月은 빛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빛은 지혜를 의미한다. 외로운 직녀지만 그러나 그는 빛과 같은 지혜를 가지고 밤하늘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마력의 소유자이다. 벽이 견우의 외로움을 막아줄 것이라는 해석은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보통 연인들과 견우는 다르다. 보통 연인들은 이럴 경우 그리움/기다림/공허감을 이기지 못하여 울고불고 징징댄다. 그러다 지치면 그들은 흔히 절망의 늪에 빠져들곤 한다. 견우는 똑같은 병을 앓고 똑같은 증세에 괴로워하여도 그것을 뛰어넘는 노력을 기울렸다. 다른 이들이 눈물을 쏟고 있을 때 그는 그것을 씹어 삼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아가 그것을 영원히 빛나는 사랑으로 승화시켜 놓은 것이다. 승화된 눈물 속에 이별의 역설이 꽃이 되어 피어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시인들이 쓰는 이별곡의 거의 전부는 눈물로 쓴 편지류에 해당이 된다. 그것은 사랑병/이별병에 대한 의학적 진단을 싯말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의학적 진단과 같은 객관적 사실--이에 준하는 상식이나 담론 따위도--에 충실한 시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시는 본래부터가 그런 사실/상식/담론을 뒤집어 엎어서 새로운 사실/상식/담론을 창조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믿고 있는 어떤 사실/상식/담론을 충실하게 형상화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비문학적이다. (반문학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고 해도)
오늘날의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고 보면 수세기 전의 황진이의 경우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위에 소개한 그의 시는 5 언 4 행, 4 행 1 연의 짧은 오언시에 지나지 않는다. 20 자의 적은 싯말인데도 그 안에다 황진이는 이별의 미학을 역설과 논리와 상징/이미지를 통하여 멋지게 선보이고 있다. 황진이의 미색이 후대인의 가슴을 흔드는데 짝하여 다른 한편으로 황진이의 미학이 후대인의 영혼을 흔드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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