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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배우며 ♬

문학이란 무엇인가 /석우 생

문학이란 무엇인가 / 2005 년 3 월 석우 생


(1) 학문으로서의 문학

(2) 문학과 창작

   1) 허구적 사실

   2) 사실적 허구

(3) 허구, 또 다른 사실 만들기

(4) 창작과 창작인

   1) 문학적 기제

   2) 창작인의 긍지


(1) 학문으로서의 문학


   문학(literature)이란 무엇인가. 언어로 쓰여진 작품,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 그것이 문학이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이란 과학(science)의 번역어이다. 연구가 학문의 특성이다. 연구의 대상에 따라서 학문은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자연과학(natural sciences)이다.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사회과학(social sciences)이다. 인간성(humanity), 인간적 가치(human value), 인간적인 것(humanness)을 연구하는 것이 인문학(humanities)이다. 연구의 목적도 영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자연과학에서는 자연현상의 법칙을 좇는다. 사회과학에서는 사회현상의 특성 내지 경향을 구한다. 인문학에서는 인간성 또는 인간적 가치의 본질을 알고자 한다. 그러나 어느 영역도 개별적, 특수적, 실제적 현상이나 사실을 연구하여 전체적, 보편적, 추상적 원리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연구의 방법도 세 영역이 조금씩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령 자연과학에서는 관찰을 더 중시한다. 사회과학에서는 묘사에 더 의지한다. 인문학에서는 해석을 보다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어느 영역에서도 위에 든 방법을 두루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지는 않다. 서로 다른 그러한 연구방법도 분석과 설명을 필수로 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같다. 모든 연구는 먼저 여러 현상이나 사실을 유형화한다. 유형화는 객관적 기준에 의거한다. 여러 유형 사이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비교, 검토하여 어느 특정한 현상이나 사실이 전체적인 맥락에서 가지는 상대적 위치를 말한다. 이것이 유형화작업이다. 이 유형화작업이 분석의 실질적인 내용을 이룬다. 이런 분석을 거쳐야 비로소 어느 현상이나 사실이 전체의 맥락 속에서 자리하거나 움직이게 되는 원리가 제대로 포착된다. 객관적 기준에 입각한 유형화, 유형화에 바탕을 둔 분석, 분석의 결과는 다시 설명으로 이어진다. 설명은 합리적, 체계적, 논리적으로 이루어진다.

   객관적, 합리적, 체계적, 논리적 분석과 설명은 모든 학문의 모든 연구에서 빠질 수가 없다. 그러한 분석과 설명에 의거하여 도출된 결론이 지식(knowledge)이다. 지식은 과학의 다른 말이고 과학은 학문의 다른 말이다. 지식과 과학과 학문이 동의어로 일컬어진다고 해서 크게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이유이다. 문학이 학문인 이상 그것도 기본이 지식이고 과학이어야 마땅하다. 문학은 학문 가운데서도 인문학에 해당이 된다. 문학은 철학과 역사학과 함께 인문학의 중추로서 널리 알려져 왔다.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은 두 분야에 의하여 견인되어 왔다. 하나가 문학비평이고 다른 하나가 문학사이다.

   과학이란 말은 주로 자연과학의 그것을 의미하였다. 그런 사정을 들어서 인간적 가치를 다루는 인문학을 과학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과학을 자연과학의 그것으로 반드시 엄격하게 좁혀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과학의 의미를 좀 더 넓게 보아서 자연과학의 연구방법에 버금갈 정도의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도출된 지식이 있다면 그것도 과학으로 이해하여 두어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인문학의 테두리 안에 있는 문학에서 과학적 사고와 방법은 변함없이 존중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2) 문학과 창작


   1) 허구적 사실


   문학을 이끌고 있는 두 분야는 문학비평과 문학사이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에서는 창작이 홀로 서 있을 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물론 창작이 없는 곳에서는 문학비평이나 문학사도 제 자리를 가질 수가 없다. 문학비평이건 문학사이건 모두가 창작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창작은 문학사나 문학비평의 소재 이상은 아니다. 창작이 주체성을 가지고 그 나름의 독자적인 활동을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문학과 창작은 서로 다르다. 관심사가 서로 다르다. 하는 일도 서로 다르다. 하는 곳도 같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문학에서 사실들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 창작에서는 허구를 매만지고 있다. 문학에서 객관적 기준을 찾고 있을 때 창작에서는 개인의 생각을 더듬고 있다. 문학에서의 일은 객관에서 출발하여 객관으로 끝난다. 창작에서의 일은 주관에서 출발하여 주관에서 끝난다. 문학에서 최종적으로 일구어 내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창작에서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주관적인 허구이다. 객관과 주관, 사실과 허구,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허구, 이것이 문학과 창작을 하나로 볼 수 없는 뚜렷한 징표이다. 특히 사실과 허구는 문학과 창작의 서로 다른 특성을 드러내어 주는 대표적 메타포이다. 사실과 허구는 단순한 상이에 그치지 않고 상반의 가치까지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둘 사이에는 대립과 갈등과 투쟁의 소지가 잠재하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은 사실을 밝혀내고 창작은 허구를 만들어낸다. 각자의 작업이 서로 다른 만큼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수단도 서로가 같지 않다. 물론 각자의 작업에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둘 다 언어이다. 그런데  각자가 쓰는 도구로서의 언어에 서로 차이가 있다. 문학에서 관찰의 대상이 되는 사실이나 사물은 특정한 사실이나 사물 그 자체이다. 그것은 다른 사실이나 사물로 대체되지 않는다. 창작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이다. 말하고자 하는 특정한 사실이나 사물 그 자체를 직접 대면하여 관찰하지 않는다. 해당되는 사실이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상징하여 주는 또 다른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별도로 설정하여 그것을 관찰한다. 사물과 상징, 비유컨대, 당사자와 대표, 이것은, 넓게는, 문학과 창작의 작업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전제적 조건이다. 이것은, 좁게는, 문학과 창작의 언어사용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전제적 조건이기도 하다.

   문학과 창작의 언어사용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전제적 조건이 하나 더 있다. 문학에서는 개념을 중시하고 창작에서는 이미지를 중시한다. 문학에서 부리는 언어는 어느 것이건 개념이 명확하여야 하고 창작에서 구사하는 언어에서는 이미지가 명확하여야 한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사물은 어느 것이나 그것의 존재가 있다. 그 존재를 증거하여 주는 것은 안으로는 속성이고 겉으로는 특징이다. 어느 사물이라도 속성이나 특징은 많다. 그 많은 속성이나 특징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존재가 확인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한 속성이나 특징은 최소한의 것이다. 그것이 개념이다. 그러나 어느 사물도 시간이 흐르거나 지역이 다르거나 또는 계급이 다르거나 하면 사람들이 각기 그 사물을 경험하고 생각하는 바가 달라질 수가 있다. 그에 따라서 어느 사물이 가지는 속성이나 특성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최대한으로 잡아볼 수 있는 속성이나 특징이 이미지이다. 쉽게 말하면 사전에서 우리가 접하는 어느 사물에 대한 의미는 개념에 해당한다. 그런 개념까지를 포함하여 어떤 사물하면 떠올려지는 속성이나 특징은 모두가 이미지에 해당이 된다.

   예를 들면 어머니를 가지고 그 개념을 말하라면 아이를 낳은 여인에 대한 사회적 지위 또는 호칭 등이라고 대답하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가지고 그 이미지를 말하라고 하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위의 개념에서와 똑같은 답이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누구는 물론 자기를 낳아준 자신의 어머니를 떠 올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는 자애로운 여인을, 또 누구는 억척같은 여인을, 그런가 하면 또 누구는 반대로 비단처럼 부드러운 여인을, 또 누구는 테레사 수녀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나이에 따라서도 남녀에 따라서도 지역에 따라서도 시대에 따라서도 사람마다 어머니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천차만별이다.    

   개념과 이미지는 모두가 어느 사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속성이나 특징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개념은 엄격성과 객관성에 있어서 이미지에 견주어 훨씬 더 강하다. 어느 사물이 가지고 있는 개념은 수에 있어서 이미지에 비하여 훨씬 더 적다. 학자는 개념을 가지고 말하고 창작인은 이미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원칙이다. 가령 문학평론을 시짓듯이 이미지로 말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창작을 개념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원칙에 어긋나기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어느 정도 서로의 언어에 의지하는 것이 불가피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일정한 한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다툴 일이 아니다. 문학평론가는 개념을 늘 유념하여 말하여야 하고 시짓는 이는 반대로 이미지를 늘 머리에 떠올려 시를 지어야 마땅하다. 시짓기를 흔히 형상화라는 말로서 일컫는 수가 있기도 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형상이란 이미지(image 또는 imagery)의 번역어이다. 형상화란 쉽게 말하면 이미지를 가지고 말한다는 뜻이다.


   2) 사실적 허구


   창작은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일 수 없다. 거듭 이야기지만 학문으로서의 문학은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고 창작은 주관적 허구를 좇는다. 객관과 주관은 상반개념이다. 사실과 허구도 상반개념이다. 그러므로 둘은 상반되는 두 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원칙적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그러하다는 이야기이다. 실제에 있어서 넓게 생각하여 보면 사정이 꼭 그러하지는 않다. 객관은 문학의 연구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당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연구자가 주관의 개입을 피해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연구자는 기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신도 아니다. 그는 인간일 따름이다. 인간은 인간적 가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을 수 없다. 연구자가 언제나 사실만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엄격한 연구자의 연구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어느 정도 허구적인 요소가 끼어드는 일은 피해 갈 수가 없다. 실제가 그러하기 때문에 오히려 문학의 연구자는 더욱 더 객관을 위하여 노력하여 갈 뿐이다. 

   문제는 창작을 맡고 있는 창작인의 경우이다. 객관과 주관의 문제, 사실과 허구의 문제에서 창작인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처지에 있을까.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는 것은 연구자의 경우에서처럼 단순하지 않다. 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이미 일어나 있는 일을 다룬다. 여기서 연구자가 다루는 이미 일어난 일이란 어떤 작가가 이미 써놓은 작품을 말한다. 어느 작가가 어느 작품을 써놓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창작인은 이 점에서 전혀 다르다. 그러한 객관적인 사실을 만들어 내는 이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작품을 쓰건 그것은 창작인의 의사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문제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문학연구자의 작업은 출발에서부터 객관적이고 창작인의 작업은 반대로 주관적이다.

   창작인은 그의 뜻대로 허구를 짓는다. 어떤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서사를 꾸며서 이야기를 끌고 가건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의사에 맡겨져 있다. 창작인이 작품에서 말하는 이야기가 설사 황탄하여 도무지 불합리하다고 해도 그 점 때문에 작가가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허구의 어느 대목이 사실적이라느니 아니라느니 하면서 왈가왈부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라도 그 점 때문에 작가의 지위를 박탈하기라도 할 듯이  창작인을 몰아세울 수는 없다고 믿는다. 애당초 우리가 창작인에게 허용한 것은 사실을 밝히는 일이 아니고 반대로 허구를 꾸며내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문학 연구자가 새장에 갇혀 있는 새라면 창작인은 창공을 나는 새인 셈이다. 누구도 이야기를 꾸며내기 위하여 자유롭게 태어난 창작인들의 그 무한한 자유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단지 창작인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꾸며내도록 후원하는 일일 따름이다. 

   창작인의 자유로운 허구 지어내기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다. 창작인에게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여기서 허구 지어내기란 무슨 뜻인가, 허구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문학의 언어를 흔히 삐딱하게 말하기(oblique orations 또는 obliquity)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낫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고도 말한다. 이 말은 서로 사이에 뉴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허구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종래 알려져 있는 객관적 사실을 뒤집어서 반대로 말하는 것이 허구의 내용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객관적 사실을 반대로 말하는 것이 허구의 내용이라는 뜻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창작인의 허구 자체를 가지고 자꾸 사실여부를 따지고 드는 일은 정곡을 찌르는 일이 못된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창작은 더 이상 객관적 사실과 무관한 것인가. 창작인은 주관과 자유의 특권을 무제한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 대답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을 반대로 말한다는 것은 종래의 것에 반대가 되는 또 다른 객관적 사실을 창조하여낸다는 뜻이다. 또 다른 객관적 사실의 창조가 바로 허구 만들기라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되면 창작인도 문학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객관적 사실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다. 허구 속에 담겨져 있는 또 다른 객관적 사실이 실질적인 의미을 지니려면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로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허구 속의 새로운 사실을 어떻게 하면 객관적인 사실로서 인정받게 될 수가 있을까. 그러려면 허구를 지어내는 일련의 작업이 누구도 인정하는 객관적인 방식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여기서 말하는 객관적 방식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체계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창작인도 문학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방법에 의지할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이 점에서 창조는 문학과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창조는 이론적으로는 문학과 상반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반대로 문학과 상응하여 조응하면서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양면성이 창작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성의 하나이다.


(3) 허구, 또 다른 사실 만들기


   허구 지어내기에는 객관적 사실에 반대되는 주관적 사실을 지어낸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허구 지어내기에는 주관적 사실을 또 다른 객관적 사실로 거듭나게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시짓기의 실제에서는 이 적극적인 의미가 중요하다. 요컨대 허구 지어내기는 종래의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객관적 사실을 지어 앉히는 일이다. 낫설게 하기라든가 삐딱하게 말하기라든가 하는 말도 허구 지어내기의 이러한 적극적인 의미를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이다. 종래의 객관적 사실을 대신하여 새로운 객관적 사실을 지어내어야 비로소 창작인은 창조로서의 창작의 이름에 값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다시 이를 나위조차가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실을 무슨 수로 뒤집을 수가 있나. 수만 년 동안 그 자리에 버티어 온 산을 무슨 수로 산이 사라져 없어졌다고 말할 수가 있나. 심장이 멎으면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진리인데 무슨 수로 심장이 멎어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가 있나. 사랑에 빠지면 이 삼 년 만에 시들해지고 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최근에는 의학자들까지도 나서서 그런 사실에 못질을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사랑은 영원하여 불멸이라고 끝까지 우길 수가 있나.

    있는 산을 없다고 하거나, 죽은 사람을 살아 있다고 하거나, 사랑은 영원하다고 하거나, 이런 주장은 작가가 창조해 내기에 좋은 또 다른 객관적인 사실의 예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야기를 듣는 이가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주겠는가 하는 점이다. 주장에 확실한 증거가 첨부되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의 주장은  황당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정확한 증거를 첨부하려면 부정하려는 사실이나 주장하려는 사실이나가 가지는 속성을 샅샅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는 합리적으로 선후관계를 따져가며 말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듣는 이가 말하는 이의 말뜻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창작인은 먼저 문학 연구자에 못지않은 과학적인 사고와 방법을 익히는 일이 긴요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4) 창작과 창작인


   1) 문학적 기제


   문학의 언어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비유법이다. 어떤 사물을 어디에 빗대어서 말하는 것이 비유의 어법이다. 작가는 어떤 사물을 직접 대면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 사물을 대신하는 다른 사물을 내세운다. 여기서 어떤 사물을 대신하는 또 다른 사물은 비유적 상징이 된다. 이렇게 상징을 골라서 비유하는 방식에 여럿이 있다. 직유, 은유, 환유, 제유, 풍유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보편적인 비유법은 직유(similie)와 은유(metaphor)이다. 강철 같은 심장이라고 하면 심장이 강철에 비유되는 경우이다. 이런 비유가 직유이다. 인생이 흐르는 물에 비유되는 경우는 흔하다. 이런 비유는 은유이다. 

   작가가 건네는 말은 개념을 통하여 하지 않는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이미지이다. “그 여인이 한 남자를 유혹한다”고 하자. 여기서 키 워드는 셋이다. 여자/남자/유혹이 그것이다. 이 셋이 중심인 이 문장은 주어/완전타동사/목적어로 구성되어 있다. 단어의 의미나 문장의 구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시인은 위와 같은 명확한 말을 버리고 아래서와 같이 표현한다. "꽃 내음 속 벌" 이라고. 여기서 단어의 의미나 문장의 구성은 위에서의 말과 반드시 똑 같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그 밖에도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해석되는가는 서사의 전체적 맥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이해되는 비유어법의 핵심은 상징과 이미지에 있다. 창작인이 적절한 상징을 설정하여 그 상징이 가지는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창작인이 비유법으로 말한다는 원칙은 사물이나 사실에 대한 분석과 설명에 있어서도 두루 적용된다. 그렇다고 창작인의 그러한 분석과 설명이 비유법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문학적 기제들(literary devices)을 동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완곡하게 말하기라든가 수사적인 표현을 쓴다든가 소리의 라임이나 의미의 리듬을 맞추는 일이라든가 생략한다든가 또는 문학 특유의 기법을 쓴다든가 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 가운데서도 문학적 기법을 익히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새로운 사실의 창조를 강조하는 경우에 더욱이나 그러하다. 문학적 기법이 바로 삐딱한 말을 만드는 가장 유효한 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삐딱하게 말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말한다는 뜻이다. 비틀거나 깍아내리거나 부풀리거나 또는 아예 반대로 말하거나 함으로서 어떤 사실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삐딱한 말에 나아가는 문학적 기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 사이에 성격에서 뿐만 아니라 정도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실을 부정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다. 대표적 기법에 대하여는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하여둘 필요가 있다. 

   문학적 기법에는 널리 쓰이는 위트(wit)와 휴머(humor)가 있다. 둘의 의미는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휴머는 부풀려서 말함으로서 자기의 아량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덮어준다. 위트는 반대로 자기의 강점이나 지혜로 상대방의 약점을 은근히 드러낸다. 둘은 이처럼 차이가 있지만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본질이 다르지 않다. 다만 이 둘의 경우 어떤 사물이나 사실에 대한 부정의 정도가 서로 미미할 따름이다. 사실 부정의 입장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기법이 냉소(cynicism)이다. 냉소는 사실부정의 입장은 뚜렷하지만 그러나 소극적이어서 그 이상은 아니다. 사실 부정을 위한 이렇다할 언행이 따르지는 않는다. 

   사실 부정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기법은 따로 있다. 행동이 적극적인 만큼  현재의 사실을 부정하는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또 다른 사실을 창조하여 내는 작업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역할은 남다르다.  새타이어(satire), 서캐즘(sarcasm), 반어(irony), 역설(paradox) 등이 그러한 예이다. 역할이 큰 만큼 그것들에게는 각자가 활동하는 그 나름의 전문영역이 있다. 관련 사실의 성격에 따라서 새타이어와 서캐즘이 하나로 묶인다. 그리고 반어와 역설이 다른 하나로 묶인다. 부정하고 새로 만들어내는 사실이 도덕적인 가치에 해당이 되는 경우에 역할을 하는 것이 전자이다. 그러한 사실이 사실적 가치에 해당이 되면 후자가 나서서 활동을 하게 된다. 도덕적 가치는 선인가 악인가 하는 기준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인간적 가치를 이름이다. 사실적 가치는 진실인가 허위인가 하는 기준을 가지고 따질 수 있는 인간적 가치를 말한다.

   새타이어와 서캐즘은 우리가 흔히 해학과 풍자라고 말할 때 풍자에 해당하는 기법이다. 둘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지는 않다. 둘 다 선과 악으로 인간의 가치를 나누어 선에 호의적이고 악에는 적대적이다. 그렇다고 둘이 반드시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새타이어와 서캐즘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새타이어는 악에 대한 그의 적대적 행동이 덜 적극적이다. 따라서 새타이어가 악의 가치에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 서캐즘은 이와 반대로 악에 대한 그의 적대적 행동이 적극적이다. 그것은 그래서 끝내 악의 가치에 상처를 남긴다.

   반어와 역설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는 않다. 인간의 가치를 진실인가 허위인가하는 잣대로 따진다는 점에서 둘은 같다. 그러한 사실을 반어나 역설이 정면에서 반대한다. 가령 목욕탕의 뜨거운 물 속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때로 “아이 시원해”라고 한다. 지나가는 예쁜 여인을 보면서 남정네들은 간혹 “죽여 주네”라고 한다. 맑은 가을 하늘을 쳐다보면서 느닷없이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라고 한 마디 던지는 이도 있다. 이런 말들이 반어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반대로 말함으로서 그 사물이나 사실을 더욱 강조하게 되는 어법이 반어이다.

   역설도 과거 이래의 어떤 사실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 경우 사실의 반대는 시간이 변화한 뒤에야 분명하여진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역동적 변화에 힘입어서 어떤 사실의 반대가 명확하여진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여기서 그들이 비로소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을 우리는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시간의 변화 즉 변화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역설은 다른 여러 기법과 다르다. 또 이 점에서 역설은 사물이나 사실을 변화의 관점에서 역동적으로 이해할 때 가장 적절하고도 유효한 관점을 제공하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2) 창작인의 긍지

   

   위에서 간략하게나마 여러 문학적 기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새로운 사실을 창조하는 작업에 있어서 모두가 도움을 줄 것이다. 기법은 다 저 나름의 구실이 따로 있어서 그 사이에 우열은 없다. 다만 기법의 활동이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의 차이에는 일정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서 기법이 각기 이루어내는 기여에 대소의 구별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기법에는 두 개의 계열이 있다. 하나는 도덕적 가치를 다루는 기법이다. 새타이어와 서캐즘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실적 가치를 다루는 기법이다. 반어와 역설이 그것이다. 세상만사에는 둘의 가치가 뒤범벅이 되어 있게 마련이다. 어느 것의 가치를 중시하는가 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자유로운 작가의 선택은  인생관이나 세계관이나 시국관이나에 드러나는 그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작가의 도덕적 가치관이나 사실적 가치관이 개입하는 것은 최대한 억제되어야 하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다고 그런 가치관이 작품에 묻어나지 않을 리는 없다. 인간이 가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인간이 가치분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동물이나 기계와 구별되는 것이다. 가치관의 유무가 인간을 동물이나 기계와 구별지우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가치관은 인간조건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도덕적 가치관이나 사실적 가치관을 마구 개입하여 창작을 하여도 좋은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작품은 정치인의 선전물이나 목사의 설교집이나 교수의 강의록이나 검사의 수사기록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창작인이 마치 자기가 학자나 목사나 검사라도 되기나 하는 것처럼 선이다 악이다 또는 진실이다 거짓이다 목청을 돋우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로맨스인가 불륜인가를 따지는 일은 목사나 신부에게 맡길 일이다. 살인인가 아닌가는 검사나 형사에게 맡길 일이다. 대통령 탄핵을 하던지 말던지는 정치인이나 시민단체에 맡겨서 처리하게 하면 된다. 창작인이 할 일은 따로 있다. 불륜이건 말건 살인이건 말건 탄핵이건 말건 창작인은 거기에 미학의 세례를 주기만 하면 된다. 어느 경우의 인간이라도--살인을 했건 어쨌건--창작인에게는 모두가 똑같이 가련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잘나고 못나고를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다. 인간적 한계를 품어 안으라고 예술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오만가지를 아름다운가 추한가의 기준으로 헤아리는 일이 예술의 길로 나아가는 첩경이라고 믿는다. 

   인간에게 기본이 되는 가치가 진위와 선악과 미추의 세 가치이다. 이 셋 가운데서도 인간 하나 하나를 동등하게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가치가 바로 미추의 가치이다. 이 가치로 세상을 내려다 보는 예술인이 휴먼니즘에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패를 지어 다투는 것의 대부분은 선악이나 진위를 내세우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세속적인 욕망들이 만나서 서로 충돌을 일으킬 소지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싸움이 끊임이 없는 곳에서 휴먼니즘은 꽃피울 수가 없다. 창작인이 휴먼니즘의 언덕에 홀로 서서 미추의 가치를 누릴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특권이고 긍지이며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