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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배우며 ♬

2006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 -1

■ 경인일보


해발 680m의 굴뚝새/심은섭


면사무소에서 4㎞ 더 지나 우편번호 233-872에 살던

굴뚝새는 사내 굴뚝새를 산 14번지에 묻어 두고

경적소리와 높은 빌딩들이 난무하는 우편번호 100-866

69층 아랫목에서 무-말랭이가 되어 간다

우체국에서 지어준 100-866의 우편번호를

문패에 문신처럼 새겨놓고 살지만

산 14번지 바람소리 전해줄

우편배달부의 발길이 끊어져버린 지가 오래다

몇 날을 견딜 수 있는 수분이 얼마 남지도 않은

해발 680m에 살던 굴뚝새를

굴뚝새의 굴뚝새들이 바라보며 쌀독에

파랑주의보가 내려 호미자루를 놓지 못하던 날들과

냉수에 간장을 섞어 헛배 채우며 새우잠 자던 날도

미납된 등록금 영수증 머리맡에 두고

밤새워 신열을 내던 일들을 떠올린다.

절구공이에 짓이겨진 그녀의 가슴에는

슬픈 보석 몇 개 박혀 있다

두어 개의 천둥소리

하얀 달 몇 개와 서너 개의 태풍 그리고

몇 밤에 내린 무서리에 말라진 몸, 더 말려야

천국의 층계 만이라도 가볍게 오르려는 듯

남아 있는 그들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안다

점점 더 멀어진 눈과 눈 사이의 간격

문 밖까지 나온 기침소리가 폐경을 맞는다

우편번호 없는 묘비를 들고 오후 내내

창 밖에서 서성이던 검은 도포를 입은 바람이

조등(弔燈)을 든 굴뚝새들의 포효를 뿌리치며

반송되지 않을 정량(定量)의 화석을

목관 속에 편히 눕힌다


 

■ 부산일보


바뀐 신발/천종숙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닳아있는 신발 뒤축에서

타인의 길이 읽혔다

똑같은 길을 놓고 누가

내 길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늘 직선으로 오가던 길에서

궤도를 이탈해 보지 않은 내 신발과

휘어진 비탈길이거나 빗물 고인 질펀한 길도

거침없이 걸었을 타인의 신발은

기울기부터 달랐다

삶의 질곡에 따라

길의 가파름과 평탄함이

신발의 각도를 달리 했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길,

나는 간신히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었다



■ 대구매일


우주물고기/강경보

- 미래과학그림展에서


미래의 어느 때에는

우리 살아갈 집이 달 옆에 있을 것이다

먼 지구의 일터로부터 귀가하는 일이

오늘 출퇴근하는 일 만큼이나 고되고 느린 것이 아니라

그냥 눈 한 번 쓱 감았다 뜨면

어느 사이 나는 우주정원의 앞마당에서 깨금발을 딛고

고층 빌딩 높이의 테라스를 지나 침실로 들어갈 것이다

은하수가 냇물처럼 반짝이며 별 사이를 흐르고

어린 시절 앞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으로

가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도 싶을 것이다 누군가

명왕성 뒤에 숨어서 우주적 망원렌즈로

얼음처럼 투명한 내 몸을 투사하기도 할 것이다

내 꿈은 비록 지금보다 육분지 오의 무게를 덜어낸

달에서 노니는 것이지만 그것은 촘촘하게 엮인

지구의 기억을 한 편 매달고 사는 일이 될 것이다

별과 별 사이에 빛의 길이 나고

택시는 허공을 날며 손님들을 태우고

어느 영화에서였지, 흰 천 조각으로 여인의 가슴과 음모를

붕대처럼 감으면 그대로 일상의 옷이 되는

그때는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백만 광년 먼 별장에서 보내는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아,

내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저 얼음별로 헤엄쳐 가는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


■ 한라일보


개성집 / 김명희


내 유년 가까운 곳에는 개성집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늙은 작부 하나가 있었고 아버지 부랑의 날들이 있었다

붉은 입술에 검은 점,

저녁이면 문득 툇마루 끝에 걸리던 속살 속의 노을,

개성집은 우리들의 적이었다

밤이 깊으면

낡은 송학표 주전자가 시끄럽게 장단을 이끌어주던

검은 루핑 지붕 밑에서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머물렀다

아교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편력은 여름내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다

돌아오는 길엔 누깔사탕과 은전 한 잎이 내 안으로 넣어졌고

나는 사탕이 다 녹기도 전 어머니에게 둘러댈 붉은 변명들을

입 안 한 켠에 감춰야만 했다

그.게.슬.픔.인.지.도.모.르.고


어린시절 내 슬픔 가까운 곳엔 개성집이라는 유곽이 있었다

아카시아는 밤마다 멀미처럼 부풀어올랐고

저녁의 라디오 속에선 붉고 격양된 노래들이 꽃잎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팝꽃이 끝나면,

한낮의 길엔 양산을 쓴 여인 하나 가볍게 스치었고

그런 날 어머니의 가슴은, 해가 지고 오랜 뒤에도

쉽사리 저물지 못했다

■ 전북일보


북어/기명숙


 살점이 뭉텅 빠진 들쑥날쑥한 몸 하나 허공에 걸려있다


 쾡한 눈알을 바람이 핥고 지나가자 파르르 눈가의 잔주름이 흔들린다 헤쳐가야 할 길을 또렷이 바라볼수록 굳은살처럼 딱딱한 몸은 야위어간다 그 해 누군가 억센 손으로 그의 내장을 파내고 그 속에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그의 몸 바깥에서 느닷없이 아카시아꽃이 펑펑 지고, 군화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늘 같이 꽃잎이 소복하게 쌓였다 바람 불어 허공이 저 혼자 우는 밤,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뻣뻣해졌다


 스물다섯 해, 맷집 하나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북어가 있다 상한 지느러미 곧추세워 풍향계처럼 헤엄치려 하는데 아무도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 큰오빠……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한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꽁치/기명숙


 접시 위에 잘 구워진 채 퍼덕거린다 물때가 채 가시지 않은 맑은 눈을 또랑또랑 뜨고 꽁치는 지금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꽁치가 다시 날아가지 못하도록 젓가락들이 날렵하게 접시 주변을 들락거린다 그러다 보니 꽁치의 살과 살 사이 흰 머리카락 같은 가시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참 성가시게 달라붙어 있다 용케도 힘을 나란히 모으면서 촘촘히 박음질한 무명 천 조각처럼 가시는 끄떡없다 이 가시는 바다에서 꽁치의 몸을 찌르던 바늘이었다 바다를 벗어나고 싶은 꽁치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을 때마다 가시는 단단해졌다 가시 때문에 아파서 푸른 물결을 뚫어야 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도망치다 보니 꽁치는 길쭉해졌다 그러다가 꽁치의 몸에 청회색 바다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들어와 박히게 되었다 젓가락들이 바다를 뜯어먹게 놔두고


지금 꽁치는 다시 날아가려고 기우뚱 몸을 한번 뒤집고 있다

반대쪽 살이 통통하다


■ 국제신문


조각보를 짓다/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 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 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 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 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 전북도민일보


바람 들어 좋은 날/김광희


도마 위에 퍼덕이는 순풍씨는요 한 마리 바다여

입이 댓 발 나온 분녀가 단칼에 기절시키고

바닥만 긴 미주구리* 아랫도릴 올려쳤거든요

성난 파도로 일어서던 비늘이

날 무딘 칼날에 힘없이 쓰러지데요

두터운 파고를 한 숨에 쓰윽 떠냈어요

대추씨 만한 부레

저렇게 작은 꿈 가지고 태양 향해 펄떡였던가 봐요

물컹한 가문에 뼈대라도 세우려는지

발라낸 뼈에서 활시위처럼 탱탱한 시간이 꽉 찼어요

가실 삼켰던지 살 속 깊이 박혔네요

바람 부는 데로 출렁였던 것은 고통의 몸부림이었던가

천 날 만 날 바람 들락였을 허파는 다 녹아 없어지고

참빗 같은 아가미에 그 바람 걸렀던 것 같아요

어딜 쏘다녔던지 얼룩진 상처 비릿한데

바다 깊은 심장 속에서 헤엄치는 분녀

꼬들꼬들 바다를 씹는 달디단 성찬 차려

황홀한 순풍씨, 쇠주 한 잔 받으셔


*미주구리: 물가자미의 경상도 사투리


■ 영남일보


봉제동 삽화/김성철



천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소나기의 망치질 소리가 시작되면

늙은 배선이 어김없이 누전 빙자한 어둠을 불렀다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재단사 김씨는 하늘위로 쌓아올려진

회색원단 눈길로 만지며 납품기일 손꼽는다

창틀 등지고 불어오는 바람

미싱 선반 위로 펼쳐진 꽃길타고 달려간다


손 맞잡은 여공들 바람의 허리춤을 잡고

꽃길 위로 걸어 들어간다

피지 못한 꽃들이며 줄기 오르지 못한 실밥들이

보푸라기 흔들며 반긴다

페달 밟는 미싱공 꽃들에게 먼저 수인사 건네자

웃자란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때 묻은 손목, 손목들

산수유열매처럼 붉게 흔들린다


재봉중인 꽃술이 실밥을 흔들었으나

접근금지를 알리는 도안선이 유난히 날을 세운다

작업반장의 기침소리와 함께 기지개 다시 피는 형광등

주파수 맞추는 고물전축, 후후 바람 불어 목청 가다듬고

여공들은 와 하며

공장안으로 퉁긴다

 

봉제동 수출공장

시동 거는 미싱들 서역 향한 길을 재촉한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봉제동 여공들은 실크로드를 걷고 있다


 

■ 무등일보


이방인의 뜰 바다는 멀다/임해원


어둑 새벽

바다의 낙조가 억새들 꺾인 무릎에 얹힌다

풀씨 같은 초저녁별을 품은 거기

눈이 부셨으나

바닷가에 사는 시인은 늘 바다가 부족하다

바다가 멀리 달아났기에

하늘을 허물어 그리로 흘려 보낸다

새떼들이 날갯짓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시간은 소멸 쪽으로 다가가고

사랑이라는 것조차

무너지는 허당을 어찌하지 못한다


떠나보내야 할 사람들 발을 묶은 섬의 한 끝씩

몸에 갇혀있던 어둠은 물음표를 세운다

주지 않았음에도 받아버린 상처 때문인가

물 위에 뜬 얼굴

괄호에 갇혀 뭉개진다

젊음의 거의를 소진하고도

설명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건

참 다행이다


말없음이 살가워지는 만큼만 세상을 이해하겠다며

어쩌다 늦게 피어난 흰 꽃에 어둠이 앉아

뜰 가득 바다가 출렁이는

하늘은 마침 밀물 때였다.


 

■ 광주일보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정동철


우리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그가 끼어 있다

손톱만한 햇살이 간신히 창에 비쳤다

사라질 때쯤이면 늘, 나는 그의 집을 지나친다


움켜쥔 칼끝으로 그가 새기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가 칼끝으로 파낸 햇볕의 부스러기들은

결코 이름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름 사이에 낀 것들을 도려내며 늙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금씩 이빨이 자라는 설치류 꽉 다문 입 속,

엉거주춤 끼어 남의 이름을 도드라지게 새기다가

반복되는 자기 생까지 파내버릴 듯하였다

날마다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하나씩 빼내

손가락 끝에 아프게 지문을 새기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도장을 하나 파러 갔다가 어느 날

나는 그의 뒤통수에 난 창문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잠깐, 둥근 보름달이었다가 그믐이 되기도 했다)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 동안

달빛이 인주를 찍어 뒤통수에 도장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