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처럼
바람처럼/松庭김순례
봄을 재촉하는 햇살 만큼 분주한 아침,
자기들끼리만 있어야 할 아이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약속 장소에서 기다릴 친구를 생각하며 종종걸음으로 집을 빠져 나왔다.
몸과 마음이 편치않아 내키지 않았지만,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약속은 지켜야겠기에 서둘러 나온 길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봄을 느껴보자는 친구들과의 단석산 산행!
홀가분하게 나서야 할 길임에도 사막을 건너 온 황사 만큼이나 마음이 희뿌옇다.
버림에 있어서 간 밤의 눈물로도 모자랐던 모양이다.
친구의 차를 타고 모임 장소로 이동할 동안에도 마음은 그냥 침대에 누워 있었다.
쉴새없이 쫑알대는 라디오 소리도,
해마다 사막을 건너 온 황사 때문에 우리의 땅이 높아져 간다는 친구의 이야기도
그저 귓가를 스쳐 지나는 바람일 뿐 내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어느 순간, 내 맘을 풀어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스피커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 나왔다.
갑자기, 마라톤 선수처럼 휙휙 지나가는 가로수 사이로
빈들을 마름질하는 창밖 풍경이 눈안에 들어오고,
친구의 흥얼거림이 귀에 들려왔다. 친구를 돌아 보았다.
친구는 음악의 장단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친구의 옆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그래,잊자. 살다보면 나쁜 일도 더러 있기 마련이고, 좋은 일도 생기기 마련인거야.
이왕 산행에 동참하기로 하여 집을 나왔으니,즐거운 산행이 되어야지.
산을 오르고 내리며 인생을 경험하는거야'
약속 장소엔 부부가 된 두 친구가 먼저 와 있었다.
'친구끼리 부부가 되어 사는 재미는 어떨까.' 속으로 웃으며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나누는 동안 우리 뒤를 따라 대구쪽 아이들이 도착했다.
저마다 들뜬 모습은 남녀 구별없이 이랑놀이하던 어릴 때나,
눈가에 주름살 가득 세운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우린, 도착하지 않은 다른 지역의 아이들을 기다리며,
김밥과 커피로 거른 아침을 먹었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선듯한 날씨 때문인지 따뜻한 커피가 좋았다.
드디어 산행 시작!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로 시작된 산행길은
산중턱을 지키고 있는 신선사까지 줄곧 힘겨운 오르막길이었다.
시작부터 땀 흘리는 중년의 친구들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숨이 차 허걱거리면서도 소풍나온 아이들처럼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친구들의 재잘거림에 겨울잠에서 막 일어난 산천이 놀라 움찔거렸다.
어디선가 정겨운 흙냄새가 코끝을 자극해 왔다.
"아! 봄 냄새"
난 봄냄새의 근원을 찾기 위해 발밑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들춰 보았다.
거기엔 겨우내 움츠렸던 거대한 산이
뻣뻣한 몸을 풀어 폭신한 흙내음을 풍기고 있었고,
그 옆엔 수줍은 듯 고개 내민 쑥잎들이
황사 사이로 가끔씩 얼굴을 내미는 햇살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가는 이의 발길에 닳아 반들거리는 길옆엔
다람쥐가 흘린 도토리 하나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봄의 모습이리라.
묵직한 바위덩이들이 제 할일 몰라 서성이는 계곡엔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였다.
응달에 듬성듬성 잔설이 보이는 걸 보면 얼음이 녹은 물이리라.
문득 자연 속에 숨 쉬고 있는 우리를 보게 되었다.
난 간밤의 마음앓이를 변명이라도 하듯이 나를 보고 자연을 보며,
미미심(微微心)이 되도록 마음을 살폈다.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일어나 제 할일 다 하는 자연의 섭리 대로
아무런 욕심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질에도 성냄이 없고,
어리석게 살면서도 어리석은 줄 모르는 인간들을 보면서도 잘난 체 않는 산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인지......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가 제각기 다르듯이, 살아온 환경도 틀리고,
타고난 성향도 같지 않고, 느끼는 감정도 헤일 수 없고,
사고 또한 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가졌더라도 표현 방법 또한 다 다를 수 밖에 없기에
타협이 필요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수만 가지의 유.무정이 존재하는 자연 속엔 아무런 다툼이 없듯
우리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하고 이해하며,
태양과 지구의 둥글거림처럼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엎드린 산에게 물어 보았다.
산은 말이 없었다. 산은 침묵하고 있지만 모든 걸 알고 있으리라.
우린 숨이 차도록 허걱대며 정상에 올랐다.
그 옛날 김유신 장군이 칼로 잘랐다는 바위 앞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어깨를 뒤로 젖히고 가슴을 열었다. 맑은 공기가 폐 깊숙히 파고 들었다.
가슴이 시원해졌다. 이것이 정상에 오른 기쁨일까?
심호흡을 하고 내려다 본 산 아래 세상은 마치 하나의 꿈 같았다.
저 아래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산 위에서는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말고 그냥 산을 보고 느끼면 될 일이었다.
몸을 돌려가며 산을 살피는 내 눈에 우리가 올라왔던 길이 보였다.
'아! 우리가 쉼 없이 올라왔던 이 길을 이제 내려가야 하는구나.
내려가는 길은 순식간이겠지.'
그렇게 힘겹게 올라왔던 길을 내려감을 알아채는 순간,
아침이 오면 밤이 찾아들고,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음의 평범한 진리 앞에
비릿한 세상사는 흐르는 땀방울과 함께 바람에 날려버렸다. 시원하게......
삶이란, 선조들의 말씀처럼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 자고,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살 일이다.
0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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